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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돌연, 자신의 두 날개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더 정확히는 날개의 뼈대를. 건축물 골조 같은. 마디마다 꺾인 곤충의 다리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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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동체, 어느 일터든 일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를 받는 경험은 '정말 여기 오길 잘 했어',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게 하지요. 감사 받으면 힘이 나고 존재이유가 생깁니다.

여러 공동체들을 체험했는데, 공통적으로 감사하는 문화가 '결핍'돼 있음을 봐요. 특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대의가 뚜렷한 집단들, 비판과 평가가 일상적인 그룹들에서는 더 심합니다. 감사를 요청하는 걸 멋쩍어 하기도 하고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걸 바라면 쓰나, 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일수록 감사를 주고받는 문화에 인색하거나 어색해하지요.

감사는, 공헌하고 기여한 것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두루뭉술한 감사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에 기반한 감사이지요. 존재를 관찰했을 때, 주의를 기울였을 때, 감사가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을 때, 더 힘이 나요. 아무리 지치고 버거워도 누군가 한 사람이 알아주고 고맙다고 해주면, 그냥 그 자리에서 기운이 나요. 감사는 그렇게 살리고 지속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종교마다 간증 체험이 있는데, 저는 감사에 대해서 간증 체험이 있어요.

중학교 때, 약 좀 올리고 말썽을 피웠던 선생님 한 분 계셨어요. 그 분은 저에게 "너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자. 고민하느라 깨어 있어. 네가 내 맘을 아냐?"하고 말씀하실 정도였어요. 그 분은 저한테 웃는 게 예쁘다고도 해주시고, 책도 공짜로 주시고, 참 잘 해주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요. 저도 그 분이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건 알았지만, 대학에 대한 입장이 다른 면에서 약간 불편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후에 연락을 해볼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아요.

13년쯤 뒤에 비폭력대화를 배울 때, '감사하기' 과정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눈을 감고 인생에서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가,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그 때 그 선생님이 보이더라고요. 정말 생각하지도 못 했는데, 그 분이 저에게 다가오셨던 노력들이, 힘든 그 시절에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를 깨달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죠. 그 때는 위안 받는지도 몰랐습니다. 짝궁이랑 롤 플레이role play로 감사를 연습하면서 엉엉 울었어요. 내가 내는 울음소리를 듣고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지요. 내가 그렇게 외로웠었나?

그 분 연락처도 모르는데, 10년도 넘어서 어떻게 만나서 직접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그리고 잊었어요.

그런데 정확히 5일 후,
산책하러 공원에 갔는데, 자전거를 끄는 그 선생님이 제 곁을 지나가시는 거예요.
거의 13년 만에 해후였죠.

그냥 지나가고 싶은 유혹이 일었지만, 기회다 싶어서 그 분을 붙잡고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 연습한 대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얘기를 나누며 성장한 눈으로 보니까, 선생님이 또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 크셨고, 성실하게 사셨으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대학을 중시했던 그 분의 욕구는 그 분 나름대로 이유와 일리가 있었다는 것. 다름은 다름대로, 감사는 감사대로. 무언가 맺힌 것이 다 풀려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빚 없다, 하는.

캐서린 한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감사와 사랑은 가장 높은 에너지라고 합니다. 감사가 흘러야 하는데 감사하지 않고 감사를 받지 않으면 그 에너지가 정체돼 삶의 어느 국면이 막힌다고 하는군요. 그 중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대요. 자녀의 존재Being 자체에 대한 감사. 그 감사는 환영welcome을 뜻하지요. 이 땅에 태어나고 나에게 와준 것에 대한 한없는 축복.

많은 방황은 땅과 괴리된 데서 와요. 그래서 하체가 부실하고 뿌리 내리질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깨닫는 것은, 땅이 언제나 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허허롭게 떠돌아다닐 때도, 언제나 떠받치고 있었던. 특별히 필요한 것은 없었어요. 그냥 나 하나면 충분했어요. 다 먹이고 재워줘요.


* '감사의 굶주림'은 <Peaceful Living>에서 NVC 인증 트레이너인 Mary Mackenzie가 쓴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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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바쁠 때는, 이렇게 꼭 잡담 한 편씩은 써야 긴장이 풀리고 재밌는 것 같아요. 잠깐, 딴짓을 한달까요?

심리학 오리엔테이션 주간이 끝나고 정식 수업 첫 시간, 탐색기간에 못 보던 학생 둘이 입실했더군요. 그 중 한 명이 이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책상 없이 의자에 앉았는데, 한쪽 다리를 다른 한 쪽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등은 뒤로 젖히고요. 수업 도중 옆 친구에게 말을 걸어요. 창문도 바라보지요. 딱딱, 볼펜 소리를 냅니다. 명상하는 시간에 눈 뜨고 있고요. 저하고 눈을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봅니다. 그걸 보자, 마음 속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긴장되고 당황스럽고 무섭고, 억눌리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지나갔죠.
'뭐 하자는 거야?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왜 심리학 시간에 들어온 거야?'
'내가 지금 여자교사라고 무시하는 거야? 남학생이 남자라고?'
'억압 당하는 것 같아.'
'지금 나한테 도전하는 거야? 기 싸움하자는 거야? 억눌리지 않으려고 힘 과시하는 거냐고.'
'앞으로도 주욱 이러면 어떡하지?'

아, 이렇게 생각하니, 피곤하고 걱정스럽고 난감하고 에너지 빠졌죠.


교무부장 선생님께, 선생님은 학생의 이런 자세를 대할 때 어떻게 대처하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선생님은 잠 자는 학생들은 좀 깨워도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쓰신대요. 하지만 어떤 선생님들은 지적을 하기도 하신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해>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왜 그 행동에 자극을 받았을까? 내가 원하는 건 뭘까? 그 학생은 무슨 마음으로 그랬던 걸까?

저는 이우 학교 처음 와서 몸이 경직되고 불편했었습니다. 낯선 학교 분위기를 파악하고 수업에서의 언행을 수위조절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긴장도 했죠. 정말이지 이  학교 어딘가, 그리고 아무데서나 대자로 누워 쉬면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제발. 한 마디로, 몸의 자유!

저는 쉼, 몸의 자유의 표현을 억누르고 있었기에, 그 친구의 행동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하! 그러자 해방감이 밀려들며, 충족되지 못했던 감정들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 욕구도 저와 비슷한 욕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들더군요. 가끔 제게도 그렇게 창문을 건너다보는 '쉬크함'이 있고...... 저도 수업시간에 해방감과 열린 공간에 대한 욕구로 창문으로 밖으로 시선이 가고 내다 보고 싶거든요. 때로 운치 있잖아요, 때는 가을인데...... 그리고 바람이긴 하지만, 100% 수업이나 학생에게 몰입하지도 못하고요.  

마침 안셀름 그륀 수도사께서 방문하실 때였는데, 강연에 참석해서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수도사님의 평화로운 목소리에 젖어들다보니까 몸이 이완되더군요. 불현듯, '나도 한 번 따라해볼까?' 하는 모방욕구가 일면서 신발을 벗고, 상체를 뒤로 젖히고, 의자에 푹 몸을 처박고 앉아 강의를 들어보았었습니다. 수도사님을 무시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수도사님 말씀이 편안하게 들리더군요. '그 학생도 이럴지 몰라' 하고 역지사지하게 되었어요.  

수업에서 몸이 점점 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어깨의 긴장이 풀리고, 룰루랄라 몸을 쉽게 움직이게 되었지요. 급기야 '정중한' 제가 살짝 감추고 있는 그림자인 '되바라짐'의 포즈까지! 뒷짐 지고, 주머니에 손 넣고, 두 손 들어 만세하고, 교실 이 쪽 저 쪽 돌아다니고... 귀여운 춤동작이며 흥얼거리는 콧노래까지! 교정 잔디에서도 드러눕고 하늘을 보기에까지 이르렀죠. 야호! 우리 수업에서 다 같이 원무 못 추고 끝낸 게 한이에요. 응해주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있었네요. 용기가 더 필요했나 봐요.

그 친구도 첫 주 후부터인가,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수업에 참여하더군요. 오잉? 또 제가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에 대한 개인적 고통스러움을 호소하며 부탁을 했더니 딱딱, 볼펜 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해주고요. 도전적으로 기 싸움하듯 보였던 눈빛은 집중력 있게 경청하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보이더군요. 눈빛이 남다른. 눈빛이 다시 보이지요.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쳤던 눈 같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남성미. 지금은 그런 눈빛을 볼 수 있었다는 걸 복으로 여깁니다. 나는 존중과 공손함을 바랐는데, 그것은 스스로 바치는, 가르치는 능력과 권위를 향한 존중, 공손함이었습니다. 보다 높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정수연 드림  

200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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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의 빛.

2010/01/14 16:48 | Posted by 정수연 labriel


 

모른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나쁜 일처럼 생각되겠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 주는 멋진 선물들 가운데 하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비에 파묻히는 것은 처음에는 굉장히 괴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신비 속에서 한없는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억압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위하여 내가 한 일들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알아내려고 안달복달하지 않습니다-아무리 그래봤자 결국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온갖 문제들 속에서 굳이 영성적인 교훈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물론 영성적인 교훈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훈들은 삶의 과정 속에서 내게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어느 하나만 따로 계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제랄드 메이(저). <영혼의 어두운 밤>, 신선명, 신현복(공역), 아침영성지도연구원(2006), pp.6-7

200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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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교육,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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